바인구트 프리드리히 베커(Weingut Friedrich Becker)는 독일 팔츠(Pfalz)의 최남단, 프랑스 국경에 맞닿은 마을 슈바이겐(Schweigen)에 있습니다. 국경이 지도 위의 선일 뿐이라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와이너리로, 도멘이 경작하는 밭의 상당 부분이 실제로는 국경 너머 알자스 쪽에 있습니다. 포도는 프랑스 땅에서 자라지만 와인은 독일 와인으로 병입됩니다.
라벨의 여우 그림은 이 사정을 그대로 담은 것입니다. 국경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드는 여우처럼, 베커의 밭도 두 나라에 걸쳐 있습니다. 토양은 알자스 북부와 이어지는 석회암과 이회토(Kalkmergel) 계열로, 독일 대부분의 산지와 달리 부르고뉴에 가까운 조건입니다.
베커는 독일 피노 누아(슈페트부르군더)의 정점으로 꼽히는 생산자이며, 같은 석회질 밭에서 나오는 바이스부르군더·그라우어 부르군더·샤르도네 화이트 역시 독일 부르고뉴 품종 와인의 기준점으로 평가받습니다. VDP 회원이며, 현재는 아들 프리드리히 베커 주니어가 양조를 맡고 있습니다.
"밭 이름이 아니라 흙 이름을 붙인 와인 — 석회 이회토(Kalkmergel)."
칼크메르겔(Kalkmergel)은 독일어로 '석회 이회토', 즉 토양의 이름입니다. 베커는 이 뀌베에 밭 이름 대신 흙 이름을 붙였습니다. 슈바이겐 일대의 석회질 이회토 구획에서 나온 그라우어 부르군더(피노 그리)를 모아 담았다는 뜻이고, 이 집 화이트의 성격이 어디서 오는지를 이름으로 못 박은 셈입니다.
독일에서 그라우어 부르군더는 흔히 풍만하고 달큰한 쪽으로 갑니다. 베커의 것은 반대입니다. 석회 토양이 산도를 붙잡아 주기 때문에 총산 7.5g/l로 곧게 서 있고, 잔당 4.6g/l은 미각에서 단맛으로 읽히지 않고 질감을 채우는 정도에 머뭅니다.
기본 그라우어 부르군더보다 한 단계 위 뀌베로, 매입 단가가 거의 두 배 차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