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를 관통한
보르도
BORDEAUX THROUGH THE CENTURIES
기원
보르도의 역사는 단순히 오래된 와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곳은 떼루아(terroir) — 즉, 땅과 기후, 인간의 손길이 어우러진 모든 것 — 자체가 역사를 써 내려간 지역이죠. 그 풍요로운 대지는 수천 년 동안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보르도 와인’이라 부르는 이름에 영혼을 불어넣었습니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와인의 씨앗이 뿌려지다
로마 제국의 시대, 가론 강(Garonne) 유역에는 이미 비투리카(Biturica) 라는 포도 품종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 품종이 바로 오늘날 카베르네(Cabernet)의 조상이죠.
그때의 보르도는 부르디갈라(Burdigala) 라 불렸고, 로마 제국의 갈리아 아키타니아(Gallia Aquitania) 속주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도시였습니다.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곳을 행정 수도로 지정했고, 서기 300년대의 시인 아우소니우스(Ausonius) 는 자신의 편지에서 메독(Médoc) 의 포도밭과 포이약(Pauillac) 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죠.
벌써 그 시절부터 와인은 보르도의 삶 깊숙이 스며 있었습니다.
아키타니아의 여왕, 엘레오노르와 잉글랜드의 인연
5세기, 여러 부족의 침입으로 고통받던 보르도는 곧 아키타니아 공국(Duchy of Aquitaine) 의 중심 도시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1137년, 한 여인이 등장하죠. 바로 엘레오노르(Eleonor).
그녀는 루이 7세와 결혼해 프랑스 왕비가 되었고, 결혼식에서는 오늘날 샤또 이쌍(Château d’Issan) 의 와인이 잔을 채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152년, 엘레오노르는 잉글랜드의 헨리 플랜태저넷(Henry Plantagenet) 과 재혼하며 아키타니아와 잉글랜드를 하나로 묶는 새로운 장을 열었죠. 이 결혼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보르도 와인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시작점이었습니다.
그녀의 궁정에서는 와인과 함께하는 세련된 식문화, 즉 ‘생활의 예술(art de vivre)’이 꽃피웠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깨끗한 물보다 와인을 더 안전하게 여겼고, 하루 평균 3리터 가까이 마셨다고 하니, 그야말로 와인이 삶의 일부였던 시대였죠.
⚔️ 백년전쟁과 샤또 탈보의 유래
아키타니아는 세 세기 동안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으며 보르도는 유럽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했습니다. 지롱드 하구(Gironde estuary)를 따라 배가 오가며, 보르도의 와인은 런던 귀족들의 식탁을 장식했죠.
그러나 그 평화는 백년전쟁(Hundred Years’ War) 으로 깨졌습니다. 1453년, 카스티용 전투(Battle of Castillon) 에서 잉글랜드 장군 존 탤벗(John Talbot) 이 전사하면서 전세가 뒤집혔죠.
그의 이름은 오늘날 샤또 탈보(Château Talbot) 로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보르도의 수많은 샤또들은, 단순한 와이너리가 아니라 역사를 품은 이름들입니다.
17세기, 새로운 르네상스의 시작
보르도가 다시 빛을 찾은 건 17세기입니다. 네덜란드 기술자들이 메독(Médoc)의 늪을 말리고, 그 덕분에 새로운 포도밭들이 생겨났죠.
이 시기, 샤또 오-브리옹(Château Haut-Brion) 의 폰탁(Pontac) 가문이 ‘뉴 프렌치 클래럿(New French Claret)’이라는 와인을 선보였습니다. 런던 대화재 이후, 그들은 런던에 Pontac’s Head 라는 고급 식당을 열고 영국 상류층에게 자신들의 와인을 알렸죠.
오귀스트 폰탁은 와인을 ‘리필(top-up)’하거나 ‘래킹(racking)’하는 기술을 발전시켜 보존성과 풍미를 향상시켰습니다.
이 작은 혁신들이 결국 현대 보르도 와인의 토대가 되었고, 오-브리옹은 1855년 분류에서 최초의 그랑뱅(Grand Vin) 으로 이름을 올립니다.
18~19세기: 세계 무대 위의 보르도
18세기 중반, 보르도는 베르사유 궁정의 잔에 오르며 프랑스 왕실의 와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리슐리외 공작은 루이 15세에게 이렇게 권했다고 하죠.
“이제 부르고뉴 대신 보르도를 마셔보십시오. 그 맛과 향이 왕에게 더 잘 어울릴 것입니다.”
하지만 혁명은 모든 것을 뒤흔들었습니다. 지롱드 지역의 귀족과 포도밭 소유주들은 큰 희생을 겪었고, 이후 19세기에는 필록세라와 곰팡이병 같은 재앙이 덮쳤습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도 희망은 피었습니다. 1886년, 샤또 도작(Château Dauzac) 의 식물학자 알렉시 밀라르데(Alexis Millardet) 가 ‘보르도 혼합액(Bouillie Bordelaise)’을 발명하며 와인 산업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 1855년의 그랑 크뤼 분류체계가 만들어지며 보르도는 명실상부한 세계 와인의 수도로 자리 잡게 되죠.
그리고 지금, 보르도는 여전히 시간의 문 앞에 서 있다
“보르도는 사랑으로 설계된 도시이며,
산책과 경이로움에 완벽히 어울리는 곳이다.
우리는 목적지 없이 길을 나서도, 결국 경이로움 앞에 서게 된다.”
보르도는 단지 와인의 도시가 아닙니다. 그곳은 시간이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 와인의 뿌리를 만날 수 있는 곳, 그리고 수 세기를 넘어 여전히 우리의 잔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이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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