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1855] 1편 기원

[보르도 1855] 1편 기원

Oct 31, 2025wineX
세기를 관통한 보르도

세기를 관통한
보르도

BORDEAUX THROUGH THE CENTURIES

기원

보르도의 역사는 단순히 오래된 와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곳은 떼루아(terroir) — 즉, 땅과 기후, 인간의 손길이 어우러진 모든 것 — 자체가 역사를 써 내려간 지역이죠. 그 풍요로운 대지는 수천 년 동안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보르도 와인’이라 부르는 이름에 영혼을 불어넣었습니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와인의 씨앗이 뿌려지다

로마 제국의 시대, 가론 강(Garonne) 유역에는 이미 비투리카(Biturica) 라는 포도 품종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 품종이 바로 오늘날 카베르네(Cabernet)의 조상이죠.

그때의 보르도는 부르디갈라(Burdigala) 라 불렸고, 로마 제국의 갈리아 아키타니아(Gallia Aquitania) 속주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도시였습니다.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곳을 행정 수도로 지정했고, 서기 300년대의 시인 아우소니우스(Ausonius) 는 자신의 편지에서 메독(Médoc) 의 포도밭과 포이약(Pauillac) 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죠.

벌써 그 시절부터 와인은 보르도의 삶 깊숙이 스며 있었습니다.

아키타니아의 여왕, 엘레오노르와 잉글랜드의 인연

5세기, 여러 부족의 침입으로 고통받던 보르도는 곧 아키타니아 공국(Duchy of Aquitaine) 의 중심 도시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1137년, 한 여인이 등장하죠. 바로 엘레오노르(Eleonor).

그녀는 루이 7세와 결혼해 프랑스 왕비가 되었고, 결혼식에서는 오늘날 샤또 이쌍(Château d’Issan) 의 와인이 잔을 채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152년, 엘레오노르는 잉글랜드의 헨리 플랜태저넷(Henry Plantagenet) 과 재혼하며 아키타니아와 잉글랜드를 하나로 묶는 새로운 장을 열었죠. 이 결혼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보르도 와인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시작점이었습니다.

그녀의 궁정에서는 와인과 함께하는 세련된 식문화, 즉 ‘생활의 예술(art de vivre)’이 꽃피웠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깨끗한 물보다 와인을 더 안전하게 여겼고, 하루 평균 3리터 가까이 마셨다고 하니, 그야말로 와인이 삶의 일부였던 시대였죠.

⚔️ 백년전쟁과 샤또 탈보의 유래

아키타니아는 세 세기 동안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으며 보르도는 유럽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했습니다. 지롱드 하구(Gironde estuary)를 따라 배가 오가며, 보르도의 와인은 런던 귀족들의 식탁을 장식했죠.

그러나 그 평화는 백년전쟁(Hundred Years’ War) 으로 깨졌습니다. 1453년, 카스티용 전투(Battle of Castillon) 에서 잉글랜드 장군 존 탤벗(John Talbot) 이 전사하면서 전세가 뒤집혔죠.

그의 이름은 오늘날 샤또 탈보(Château Talbot) 로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보르도의 수많은 샤또들은, 단순한 와이너리가 아니라 역사를 품은 이름들입니다.

17세기, 새로운 르네상스의 시작

보르도가 다시 빛을 찾은 건 17세기입니다. 네덜란드 기술자들이 메독(Médoc)의 늪을 말리고, 그 덕분에 새로운 포도밭들이 생겨났죠.

이 시기, 샤또 오-브리옹(Château Haut-Brion) 의 폰탁(Pontac) 가문이 ‘뉴 프렌치 클래럿(New French Claret)’이라는 와인을 선보였습니다. 런던 대화재 이후, 그들은 런던에 Pontac’s Head 라는 고급 식당을 열고 영국 상류층에게 자신들의 와인을 알렸죠.

오귀스트 폰탁은 와인을 ‘리필(top-up)’하거나 ‘래킹(racking)’하는 기술을 발전시켜 보존성과 풍미를 향상시켰습니다.

이 작은 혁신들이 결국 현대 보르도 와인의 토대가 되었고, 오-브리옹은 1855년 분류에서 최초의 그랑뱅(Grand Vin) 으로 이름을 올립니다.

18~19세기: 세계 무대 위의 보르도

18세기 중반, 보르도는 베르사유 궁정의 잔에 오르며 프랑스 왕실의 와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리슐리외 공작은 루이 15세에게 이렇게 권했다고 하죠.

“이제 부르고뉴 대신 보르도를 마셔보십시오. 그 맛과 향이 왕에게 더 잘 어울릴 것입니다.”

하지만 혁명은 모든 것을 뒤흔들었습니다. 지롱드 지역의 귀족과 포도밭 소유주들은 큰 희생을 겪었고, 이후 19세기에는 필록세라와 곰팡이병 같은 재앙이 덮쳤습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도 희망은 피었습니다. 1886년, 샤또 도작(Château Dauzac) 의 식물학자 알렉시 밀라르데(Alexis Millardet) 가 ‘보르도 혼합액(Bouillie Bordelaise)’을 발명하며 와인 산업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 1855년의 그랑 크뤼 분류체계가 만들어지며 보르도는 명실상부한 세계 와인의 수도로 자리 잡게 되죠.

그리고 지금, 보르도는 여전히 시간의 문 앞에 서 있다

“보르도는 사랑으로 설계된 도시이며,
산책과 경이로움에 완벽히 어울리는 곳이다.
우리는 목적지 없이 길을 나서도, 결국 경이로움 앞에 서게 된다.”
— 프랑수아 모리악 (François Mauriac)

보르도는 단지 와인의 도시가 아닙니다. 그곳은 시간이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 와인의 뿌리를 만날 수 있는 곳, 그리고 수 세기를 넘어 여전히 우리의 잔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이름입니다. 🍇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 -

© 보르도 1855 협회로 부터 받은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된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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